(20년10월10일)72세 할머니 통장에, '첫 월급'이 들어왔다/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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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대문관리자 조회 1,466회 작성일 2021.05.1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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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세 할머니 통장에, '첫 월급'이 들어왔다[남기자의 체헐리즘

[할머니들, 수십년 주부 경력 살려 '강아지 수제 간식' 요리…대학생들 아이디어, "좋은 일자리 드리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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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껌을 만드는 이희자 할머니(71, 가명). 
한천가루와 락토프리 우유(소화가 잘 되는 우유)를 섞어 천천히 끓이는데, 단순히 젓는 것도 주부 내공이 더해지니 달랐다./
진=설거지나 해야겠다 생각 중인 남기자

호박 고구마 수십여 개가 두 눈을 현혹했다. '어서 마트에서 날 꺼내달라' 외치는 듯했다. 이중 무엇이, 우리 강아지들이 먹을만한 진짜 괜찮은 놈인가. 모양은 제각각, 색깔은 비스름해서 쉽지 않은 문제였다.

'주부 경력 41년'에 빛나는 표춘희 할머니(72)가 비닐을 들었다. 그의 곱고 매서운 손이 호박 고구마를 감별하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집고, 눈으로 훑고, 한 바퀴 쓱 돌리고, 끝! 당당히 합격한 녀석은 "고맙구마"라 외치며 비닐로 들어왔고(언어유희), 아닌 녀석은 가차 없이 다시 떨궈졌다. 참으로 든든한 감(感)이었다.

좋은 고구마는 정성껏 조리돼 '강아지 수제 간식'으로 거듭나리라. 그게 표 할머니가 하는 일이었고, 그에겐 이곳이 생애 첫 직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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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수제 약과를 만들기 위해, 호박 고구마를 고르는 표춘희 할머니(72). 좋은 고구마를 골라달란 말에 날카로운 눈이 번뜩였다./사진=한아름 대표


그 이름하여 '개로(老)만족', 강아지와 할머니 둘 다 좋았으면 하는 의미로 지었다. 할머니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주는 '소셜 벤처(사회적 가치를 내며 수익을 내는 기업)'다.

이를 처음 시작한 건 한국외대 대학생들이다. 한아름 대표(22)가 아이디어를 냈다. 할머니 손에 자란 그는, 커서도 힘들 때마다 할머니 집에 갔다. 따뜻한 밥 한 끼가 그리 위로가 되었다. 그러니 언젠가부터는 고되게 폐지 줍는 할머니들에게 마음이 쓰였다. 좀 더 편안하고 재밌는 일자리가 없을까 싶었다.

그러다 생각한 게 '할머니가 만드는 강아지 간식'이었다. 언젠가 할머니 집에 한 대표가 키우는 강아지 둘(콩이랑 밀크, 두유 자매)을 맡겼는데, 케미(호흡)가 좋아 무릎을 쳤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주듯, 꼼꼼히 만들면 믿고 먹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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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만족'에 가서 할머니들과 직접 수제 간식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걸 6살 똘이(기자의 반려견, 간식에 달려드는 상단 움짤 참조, 하얗고 털 쪘음)에게 먹여보기로. 간식만 먹으면 응아가 무른데, 이건 과연 어떨까 궁금했다(결과는 마지막에, 기사 고정).

그리고 좋은 곳을 소개해준 SK 소셜밸류커넥트2020 행사(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축제, SOVAC), 그리고 양성욱 SK그룹 PRPL(강아지를 좋아하는 힙합 마니아)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두 할머니의 '첫 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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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강아지들이 이렇게 잘 먹어요." 한아름 대표가 할머니들이 만든 간식에 대한 피드백을 보여주면, 그리 보람이 크단다. 일을 시작하기 전 이야기를 나누는 한 대표와 두 할머니./사진=남형도 기자

"아이고, 기자님 생각을 못 했네. 사과를 더 가져올 걸 그랬어요, 아이참."

사과 한쪽씩 먹으려 싸 왔다는 이희자 할머니(71, 가명)의 첫인사가 그랬다. 내가 올 줄 몰랐다며 안타까워하는 표정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포근해졌다. 옆에 있던 표춘희 할머니(72)는 넉넉한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오랜만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오르는 그 진한 온기. 그래서 서울 성북구에 있는 개로만족 작업실은 처음 봤건만 어쩐지 낯설진 않았다.

두 할머니에게 여긴 첫 직장이었다. 젊은 나이에 결혼해 집안일만 쭉 했다. 주부 경력만 각각 42년, 50년씩 됐다. 시간은 무심히도 빠르게 흘렀다. 표 할머니 말마따나 "엊그제 환갑이었는데 벌써 일흔이 되었다"고. 진짜 그 나이로 안 보인단 말에, 그는 해맑게 웃었다.

일하고 싶었을 땐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요리하는 게 좋아 50대에 전문대 호텔조리학과까지 졸업했던 표 할머니는, 막상 배운 걸 써먹지도 못했다. 그리 세월이 흘러 70대 초입이 되었다. 이들은 우연히 동대문 시니어클럽을 통해 개로만족에 왔다. 다음 주에 또 다른 할머니 두 분이 더 오면, 내년까지 네 분이 함께 일하게 된단다.

평생 집안일 말곤 다른 건 꿈도 못 꿨다는 이 할머니, 이제야 적성을 좀 살려보게 됐다는 표 할머니. 손을 빡빡 씻고, 위생모에 앞치마, 위생 장갑까지 다 착용하는 할머니들을 보며 부엌서 많이 봤던, 익숙한 엄마 모습이 떠올랐다. 그랬다. 이미 그들은 이 분야 최고 전문가였다. 집에 있어 간과했을 뿐.


큰 칼로 고구마 '쓱쓱', 당근 '댕강댕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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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과 할머니들이 힘을 합쳐 만든, 강아지 수제 한과 간식 레시피. 그날 장 봐온 신선하고 좋은 재료만 쓴다. 자세한 레시피는 비밀./사진=남형도 기자

이날 만들 강아지 수제 간식은 '미니 약과' 4세트(64개)와 '유과' 3세트(18개). 아침에 한아름 대표와 할머니가 마트에서 장을 직접 봐 왔다. 100% 신선한 식재료만 쓰고, 화학 첨가물도 안 넣는다. 이 할머니는 미니 약과, 표 할머니는 유과를 맡기로 했다. 한 대표가 레시피를 설명한 뒤, 바로 요리가 시작됐다.

이 할머니를 따라 미니 약과를 만들기로 했다. 호박 고구마를 먼저 깎아야 했다. 껍질 깎는 칼을 찾고 있는데, 할머니는 대뜸 큰 주방 칼을 드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고구마 껍질을 쓱쓱 벗겨내기 시작했다.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자니 할머니는 "많이 배워놔요, 그래야 장가가서 잘하지요"라고 했다(전 이미 몇 년 전에 갔는데, 할머니 감사해요).

껍질을 벗긴 뒤에도 이 할머니는 이리저리 고구마를 굴리며 손질을 이어갔다. 다 된 것 같은데도 잘라낼 부분을 더 잘라내었다.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 건 괘념치 않기에, 나도 따라서 손질했다. 더 좋은 걸 먹이고 싶은 할머니 마음이 이런 것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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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을 댕강댕강, 노련함이 돋보이는 표 할머니의 칼질./사진=우와를 반복하는 남형도 기자

유과를 시작한 표 할머니는 닭을 빠르게 손질해 갈아놓고, 당근을 댕강댕강 썰었다. 정말 빠르면서도, 크기가 균일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칼질이 정말 능숙하다"며 엄지를 척 올렸더니, 표 할머니는 쑥스러워하며 "요즘은 남자가 더 잘해요"라고 했다(저는 잠시 숨을게요).

두 할머니 모두 지난달 초에 시작해 이제 일한 지 한 달쯤 되었는데, 금방 능숙해졌다. 이것이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인가. 옆에서 봐도 그래 보였다. 한 대표는 "레시피 교육을 보통 한 번 하면 끝난다. 보여드리기만 해도 바로 따라서 잘 하신다"고 했다.

손수 골라냈다, 반죽이 부드러워야 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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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고구마에 뭉친 덩어리가 있다며, 강아지들이 먹으면 안 된다며 손수 골라내는 이 할머니./사진=남형도 기자


오랜 기간 가족들을 먹일 음식을 해와서였을까. 능숙함을 돋보이게 하는 '정성'은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호박 고구마를 삶은 뒤 으깨는 작업을 했다. 쌀가루, 달걀노른자와 반죽하기 위해서였다. 충분히 으깼다 생각했는데, 이 할머니가 뭐가 성에 안 차는지 반죽을 계속 손으로 하나하나 만지는 게 아닌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곱게 안 부스러지고 딱딱한 덩어리가 있어요. 먹을 때 이런 게 있으면 안 돼요"라고 답했다. 보기엔 고와 보였는데도.

그러더니 반죽을 한참 만지며 덩어리를 골라내고, 다시 곱게 매만지고, 다시 골라내고, 또 만지며 부수고. 그러면서 이 할머니는 "희한해요. 똑같은 고구마인데 왜 이런 덩어리가 있을까. 이건 과학적으로 풀어내야 해요"라고 혼잣말을 했다. 지루할 만치 섬세한 작업 덕분에 삶은 호박 고구마는 더욱 고와졌다. "아까보다 고와진 것 같다"며 이 할머니는 환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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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에게 먹이는 마음으로 강아지 간식을 만든다, 그게 가장 큰 장점이 아녔을까. 옆에서 지켜보니 정말 그랬다./사진=남형도 기자


할머니는 손질한 닭을 간 것과 당근, 쌀가루를 합쳐 반죽을 만들었다. 그걸 동그랗게 만들어 코코넛 가루를 묻히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닭으로 만든 반죽이라, 모양이 잘 나오지 않았다. 표 할머니는 동그랗게 말아 손에서 다른 손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그는 "공기와 만나며 반죽이 찰지게 되는 거예요"라고 설명해줬다. 그를 따라 해보니, 동글동글 모양이 잘 나왔다. 그 또한 섬세한 정성이었다.

할머니보다 내가 잘한 것 하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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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량은 정확하게, 손짐작으로 만든 요리가 과학으로 바뀌는 순간이다./사진=남형도 기자

으레 할머니들이 손주를 보면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내 강아지. 왜 이렇게 말랐어." 그리 말하며 무엇 하나라도 더 주려는 넉넉함. 그게 만드는 과정에서도 느껴졌다.

이 할머니보다 요리 과정에서 잘한 게 딱 하나 있었는데, 호박 고구마 반죽을 약과 모양 틀에 넣는 거였다.
나는 틀에 맞게 찔끔찔끔 떼어서 넣은 덕분에, 약과 가장자리 꽃 모양이 예쁘게 나왔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반죽을 큼직큼직 넣어 오히려 약과 모양이 덜 예쁜 게 아닌가. 가장자리가 둥그스름해서.

그러거나 말거나, 할머니는 내게 "이걸 요래 한 번 해보세요. 재밌어요. 꾹꾹 눌러야 해요"하며 인심 좋은 할머니 표 약과를 만들어 나갔다. 이것 참, 모양은 내가 더 예쁜데 어쩐지 기분 좋게 또 졌달까. 거기에 할머니의 따뜻한 마지막 한 방이 이랬다. "기자님, 작업 테이블이 우리 키엔 딱 맞는데, 허리 아프지요? 이건 내가 할 게, 그냥 두어요."
한 대표도 "할머니들이 습관적으로 푸짐하게 해주려는 게 있다"며 "포장할 때도 하나 더 넣자 하시고, 재료도 아낌없이 쓰셔서 항상 정량보다 많이 드리는 것 같다"고 웃었다.


아침에 출근하는 기분이, 참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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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빚어낸 강아지 미니 약과가 건조되고 있다. 기자가 만든 (예쁜) 약과도./사진=흐뭇한 남기자


두 할머니는 정성껏 만들고, 한 대표는 옆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하나하나 조언을 했다. 그 덕분에 미니 약과와 유과 모두 막바지 단계에 들어갔다. 3시간쯤 건조를 시킨 뒤 기다리면 되는 거였다.

할머니들에게 은 어떤 의미일까. 이런 이야기가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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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만들어진 할머니표 강아지 수제 간식들./사진=개로만족 인스타그램(@gaeman_love)


표 할머니: "아침에 늙고 못생긴 얼굴이라도 바르고 그러면요. 이렇게 화장하고 출근한다는 게 참 좋더라고요. 아침 8시 30분에 나오는데요. 지하철 타면 젊은 사람들하고 같이 오잖아요. 생기 있는 모습 보면 활력도 생기고요. 일할 수 있는 게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이 할머니: "집에 있으면요. TV나 보고 청소하고 그랬어요. 오후엔 뒷산 산책하고, 참 무료한 노인들이 많지요. 이 일이 참 좋아요. 만드는 재미도 있고, 와서 친구(표 할머니)도 한 명 사귀었고요. 용돈도 조금이지만 벌고, 사회적으로도 참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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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춘희 할머니가 강아지 수제 간식의 달인이 되어, 또 다른 할머니에게 가르치는 꿈을 이루기를./사진=한아름 대표

그리고 다시 오래 못 이룬 꿈을 다시 품게 하는. 표 할머니는 어릴 적 꿈도 다시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손사래 치며) 아유, 글쎄 이 나이에 꿈은 무얼요. (잠시 생각하다) 옛날엔 누구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근데 이젠 나이가 너무 많아요. 제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그 말에, 요즘엔 강아지 수제 간식 클래스도 많이 열린다며, 할머니가 가르치면 어떠냐고 했다. 그러자 표 할머니 미소가 벚꽃잎을 닮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래요? 호호. 그럼 레시피 연구를 열심히 해봐야겠어요."


똘이야, 할머니가 만든 간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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냠냠, 할머니들이 만든 약과가 똘이 입으로 쏙 들어가는 순간./사진=심쿵한 남기자


이제 할머니 표 간식의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심사위원은 6살 반려견 똘이. 간식을 무척 좋아하는데, 먹이기만 하면 응아가 좋지 않았다. 패드를 가을 단풍 색깔로 곱게 물들이곤 했다. 그래서 칭찬할 때만 아주 조금씩 줄 수밖에 없어 아쉬웠다.

배송 주문한 수제 간식이 왔다. 귀여운 설명서도 동봉돼 있었다. '표춘희 할머님, 이희자 할머님께서 깨끗하게, 정성껏 요리하고 포장해주셨다'고. 아무렴, 옆에서 어떻게 만드는지 다 지켜보았으니까. 화학 첨가물 없는 좋은 재료라 냉동 보관을 한 뒤, 찬 간식에 배 아프지 않게 전자레인지로 해동해달란 꼼꼼한 당부까지. 그에 따른 뒤, 마침내 유과 하나를 똘이 앞에 대령했다.

냄새를 맡은 녀석은 이성을 잃고 '어서 그것을 내놓거라, 보호자라 부르는 자야. 내 이미 그게 내 것임을 알고 있으니(내 추측)'하며 내 팔을 보송보송 두 발로 붙잡았다. 다급히 "기다려, 손. 기다려, 손"을 외쳤다. 뚫어질 듯 보는 똘이의 까만 동공이 확장되다 못해, 인터스텔라 마냥 다른 차원으로 여행을 갈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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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식을 잘라서 주니, 순식간에 '냠냠 쩝쩝' 다 먹었다. 여운이 남는지, 더 내놓으라고 초필살기인 애달픈 눈빛으로 날 채찍질했다. 그래도 안 주니 거실 여기저기를 킁킁거리며 돌아다녔다(위 움짤 참조, "더 주세여"). 꽤 맛있었던 모양이었다.

대망의 다음 날 아침, 똘이는 간식 후 첫 응아를 했는데 상태가 좋았다. 다행이야, 할머니 간식이 썩 잘 맞아서.


젊음과 나이 듦이 만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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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런 사이에요!" 팔짱을 끼고 사이좋게 장을 본 뒤 돌아가는 한아름 대표(왼쪽)와 표춘희 할머니(오른쪽)./사진=한아름 대표 셀카


스물셋 대학생과 일흔둘 할머니가 팔짱을 끼고 장 보러 가는 광경에서, 노년 일자리의 해답 하나쯤은 찾은 것 같다. 참 오래도록 고민도 많고 풀기로 어려운 문제라 여겼는데.
아이디어가 많지만 경험이 적은 한 대표는 표 할머니에게 고구마를 골라달라 했고, 그리 담은 무거운 비닐봉지는 한 대표가 기꺼이 들었다. 손짐작으로 요리해 온 할머니들에겐 정확한 계량 레시피 카드가 필요했고, 이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어떤 재료가 궁합이 좋은진 또 연륜이 필요했다. 50년 세월을 뛰어넘은 케미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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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름 개로만족 대표(가운데)와 이를 함께 만들어 낸 훌륭한 한국외대 대학생들./사진=개로만족 인스타그램(@gaeromanjok)


젊은 대학생들은 무급을 불사하고 학점을 뒤로 미루며 아이디어를 냈다. 할머니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선물하겠다며. 사람 음식은 오래 해온 일 아닌가. 그래서 지겨울 것 같다며 강아지 수제 간식을 선택했고, 그건 수요가 많아 유망했고, '개로만족'이란 이름을 세 시간 넘게 고민했고, 마침내 떠올린 순간 여럿이 학교서 소릴 질렀다. 그 모든 노력이, 돈 주고도 못 사는 오랜 경험과 만나니 시너지가 엄청났다.

지금까지 개로만족과 만난 할머니는 모두 14명. 이들에겐 새로운 삶이 선물처럼 생겼다. 어릴 때 꿈이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으나 아버지에게 "무슨 기집애가 중학교를 가냐"는 소릴 들었던 이명옥 할머니(73)도, "손주가 최고 좋아하는 피자며 요리 실력이, 실은 전문성이란 걸 알게 됐단 표춘희 할머니도. 코로나19로 중단될 위기에 처했을 때, 관할 구청이며 대한노인회에 달려가 "일하게 해달라"며 민원을 넣었던 것도, 그 삶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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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처럼 요로코롬, 귀여운 할머님들./사진=개로만족 인스타그램(@gaeromanjok)


노인 고용률은 2위(OECD 회원국 기준)에 달하면서, 노인 빈곤율은 1위인 이유가 뭘까. 일할 수 있음에도, 경력이 충분함에도, 이들이 사회에서 남겨진 일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 40.1%는 청소나 경비 등 단순 노무직에 종사하고 있다(한국노인인력개발원). 그 일의 가치를 낮추는 게 아니라, 이젠 좀 더 다양한 일자리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인구 다섯 중 하나가 65세 이상인 '초고령화 사회', 그게 불과 5년밖에 남지 않았으므로(통계청).

그리고 '나이 듦'이라는 것, 그건 지금 이 글을 읽는 짧은 순간에도, 뾰족한 수 없이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나를 포함해 살아 있는 모든 그대들에게.

그러니 한 대표의 포부는 이리 당찼다. "대한민국 모든 할머니라면 '나도 수제 간식 요리사 한 번 할까?' 그리 생각하는 거요. 전국에 개로만족 오프라인 지점도 만들고요. 반려인 분들은 할머니가 만든 거니 안심하고 먹여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그리고 있어요(쑥스럽게 웃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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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는 박윤숙 할머니(72). 청춘은 시기가 아닌 마음가짐이라 했으니, 무지개색으로 다채롭게 물드는 삶이 되기를./사진=개로만족 에필로그(epilogue).

박윤숙 할머니(72)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세월이 그리 녹록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걸 하게 두지 않았다. 애 키우기 바빠 일도 못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본인을 위한 건 다 사치가 되고, 마음 구석 한편에 미뤄두었다. '나중에', '언젠가'란 말로 미루는 사이 검은 머리엔 흰 서리가 내려앉았다. 건반을 바라던 손엔 곱게 주름이 졌다. 대체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험한 일만 남았다 믿고 좌절하던 차에, 강아지 간식을 만들게 됐다. 생애 첫 월급이 들어온 날, 할머니는 떨리는 맘으로 피아노 학원에 갔다. 그날 바로 등록을 했다. 그리 하고 싶었던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서툴게나마 뒤늦게나마 오롯이 바랐던, 날 위해서만 쓰는 귀한 시간이다.

'0월 급여', 통장 계좌에 찍힌 그 짧은 문구가 준 용기가 그렇게 컸던 것이리라. 평생 해온 가사 노동을, 누군가에게 당당히 인정받은 것이었으니까.

남형도 기자 human@mt.co.kr